한국의 영화와 드라마는 21세기에 들어서며 글로벌 취향과도 공감대를 이뤄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작품들은 해외 특정 지역에서 크게 흥행하거나 홍상수, 박찬욱 등 몇몇 감독들에 대한 해외 마니아층이 생기기도 했다.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는다고 했다. 세계 대중문화 산업의 실세인 미국에서의 〈기생충〉과 뒤이은 〈미나리〉의 성과는 한국영화를 넘어 드라마까지, 즉 한국의 영상 서사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우리 콘텐츠는 세계의 기대에 부응하기에 충분히 준비된 상태였다. 이는 결국 한국의 영상 서사물 제작 능력이 세계적 수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그 한 축을 이루고 있는 K-OST에서 포착된 몇 장면을 소개한다.
〈오징어 게임〉의 리코더 소리
〈옥자〉와 〈기생충〉을 통해 한층 성장한 정재일 음악감독이 김성수 음악감독과 박민주 작곡가의 조력을 받아 작업한 〈오징어 게임〉의 음악은 드라마 자체의 화제성에 힘입어 함께 주목받았다. 특히 많은 이들에게 〈오징어 게임〉을 인상 깊게 각인시킨 장면들에서 리코더 소리를 전면에 활용한 음악은 특유의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세계와 격리된 섬에 특별히 지어진 거대한 게임장은 참가자들을 현실과 유리된 게임 속 말-플레이어로 내모는데, 이 비현실감은 참가자들이 서로에 대한 배려나 윤리의식 등으로부터 무감각해지도록 부추긴다. 여기서 3-3-7 응원 박수 리듬에 얹힌 리코더의 선율은 ‘돈과 생존’이라는 단순한 두 가지 논리에만 매몰되도록 내몰린 참가자들의 최면의 음악이다. 또 다른 테마에서, 단순하고 유아적인 멜로디를 연주하는 악기로 추억되던 리코더 소리가 만들어내는 기괴한 불협의 심상은 동심과 순수의 상징이었던 게임을 통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도 불사해야 하는 참가자들이 느끼는 심리적 혼돈과 불안을 대변한다. 어릴 적 즐겼던 순수와 추억의 상징이었던 게임,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냉혹한 게임장의 현실이 맞물려 자아내는 이질감의 불편함은 리코더의 불협화음을 통해 극대화된다. 어떤 오리지널 스코어가 음악만으로도 그 작품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을 곧장 소환할 수 있다면 OST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셈이다. 〈기생충〉의 음악으로 아카데미 음악상 예비 후보에 올랐던 정재일은, 〈오징어 게임〉의 음악으로 ‘할리우드 뮤직 인 미디어 어워즈 TV 쇼·드라마 부문’을 수상함으로써 더 왕성한 활동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모가디슈〉의 오케스트레이션
오케스트레이션은 영화음악의 꽃이다. 현대적인 전자악기들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는 가용한 악기가 종래의 관현악기들이었기 때문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대중음악에 주로 쓰이는 악기들을 포함하여 각종 전자악기, 컴퓨터의 발달로 인한 가상악기까지, 오케스트라를 대체하여 사운드트랙을 꾸밀 소리는 훨씬 다양해졌음에도 큰 자본이 투입된 영화일수록 오케스트레이션이 선호된다. 이유는 한 가지로 말할 순 없다. 등장인물의 감정을 대변하는 것이 사운드트랙의 가장 일차적인 기능이라면 전자악기나 프로그래밍 된 소리에 비해 인간 숨결의 가장 자연스러운 표현이 가능한 것이 전통적인 관현악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악기 하나가 하나의 선율과 리듬을 담당한다면 100명이 넘는 구성원으로 이루어지는 풀 사이즈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가장 많은 선율과 리듬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대의 블록버스터 영화 오케스트레이션에서는 선율적으로 종래의 관현악 중심의 오케스트라에 리듬 표현에 있어 다양한 민속 타악기나 대중음악의 세트드럼 사운드가 보조되어 사용되는 형태가 가장 일반적이다.
과거 한국의 영화, 드라마에서 풀 사이즈의 오케스트레이션이 사용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일단 음악 부문에 그 정도로 투자할 정도로 제작 규모가 크지 않았고 자본이 가능해도 클래식 음악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작/편곡, 연주되어야 할 사운드트랙 오케스트레이션에 능숙한 음악가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특별히 ‘야심찬 기획’에서나 간혹 시도되곤 했다. 그중 성공적인 기록을 남긴 것이 〈올드보이〉의 음악 같은 경우다. 하지만 2010년대를 넘어서며 영화와 드라마의 양적, 질적 성장과 함께한 OST 산업의 발전으로, 특히 영화에서의 오케스트레이션은 점점 빈번해졌고 당연하게도 이를 통해 축적된 더 많은 경험과 노하우는 한국 사운드트랙 오케스트레이션의 성장을 가져왔다.
록과 블루스를 근간으로 하는 듀오 ‘유앤미블루’ 출신으로 〈모가디슈〉의 음악을 이끈 방준석 음악감독은 이러한 한국 사운드트랙 발전사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이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 영화씬 주요작들의 음악을 맡아 온 그는 201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부단한 학습과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종래의 밴드 악기 위주의 작업에서 오케스트레이션 작업까지 표현력을 확장했다. 〈사도〉와 〈자산어보〉를 지나며 보여준 섬세한 서정성을 통해 진일보한 그의 오케스트레이션은 비교적 최근작인 〈신과 함께〉와 작년의 〈모가디슈〉에서 액션 블록버스터 오케스트레이션의 백미인 날카로움과 다이내믹까지 능숙하게 버무린 소리 배경을 보여줬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과 부일영화상 음악상을 수상한 〈모가디슈〉의 음악은 얼마 전 병환으로 안타깝게 떠난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그 해 우리는〉의 노래
앞선 두 경우가 오리지널 스코어, 즉 가사가 없는 배경음악의 사례였다면 〈그 해 우리는〉 OST의 선전은 ‘오리지널 송’의 사례다. 〈그 해 우리는〉의 OST는 풋풋하고 순수한 청춘들의 사랑을 그린 작품의 감동을 배가시키는 완성도 있는 곡들의 섭외와 운용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중저음의 소울풀한 보이스가 매력인 BTS의 뷔가 부른 〈크리스마스 트리〉는 팬덤의 응원과 더불어 한국 OST 음악 최초로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진입했다. 그리고 이는 곧 〈그 해 우리는〉 OST의 나머지 삽입곡과 참여한 다른 뮤지션들이 덩달아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드라마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도 확장되는 고무적인 현상으로 이어졌다.
서영호 음악가, ‘원펀치’와 ‘오지은서영호’에서 활동. 《쿨투라》 신인상 공모에 ‘영화음악평론’으로 당선. 주요 앨범으로 《Punch Drunk Love》 《작은 마음》 등이 있다.
* 《쿨투라》 2022년 5월호(통권 95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