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 장희주(쿠바영화제 프로그래머, 문화예술기획자)
책꽂이에 꽃혀 있는 손때 묻은 체 게바라 평전과 호세 마르티 시집처럼 쿠바라는 나라는 오래전부터 내 마음 속 여행 버킷 리스트로 저장되어 있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고 비디오테이프를 몇 번씩이나 돌려보며 언젠가는 그곳에서 라틴음악을 들으며, 모히또를 마셔보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다녔지만 좀처럼 쿠바행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2005년 애틀랜타에 머무를 때에는 마이애미 리틀 아나바를 둘러보며, 지척이 쿠바인데도 갈 수 없는 안타까움에 한없이 밤바다를 바라보기도했다. 그런 ‘미지의 나라’ 쿠바를 지난 4월에 찾게 된 것은 한류 열풍 덕이다. 남미로까지 번진 한류열풍의 기획 취재를 위해 콜롬비아 보고타를 거쳐 이곳 쿠바에 오게 된 것이다.
시인 호세 마르티의 이름을 딴 국제공항
아바나 호세마르티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이었다. 붉은색으로 도색한 공항이 쿠바스러움을 더한다. 쿠바의 관문인 이 국제공항이 시인 호세 마르티의 이름을 땄다는 사실도 괜히 부럽다. 시인 호세 마르티는 19세기 스페인에 맞선 쿠바 독립영웅으로 쿠바 국민들에게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국제공항 이름도 호세마르티공항이고 지폐, 거리, 광장, 학교 등 쿠바 곳곳에서 그의 이름을 만나게 된다.
수속을 마치고 공항 밖으로 나오자 카리브해의 햇살에 눈이 부셨다. 남미 고유의 원색과 강한 색감의 대비로 낯선 미지의 세계에 착륙한 듯 두리번거리는 외계인을 장희주(안젤라 장) 선생이 맞아주었다. 통역 가이드를 맡은 장희주 선생은 쿠바가 좋아서 쿠바남자와 결혼한 문화예술기획자다. 쿠바영화제 프로그래머로도 활동하고 있는 장희주 선생을 쿠바에서 통역가이드로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그녀의 문화예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친절한 설명은 쿠바의 문화와 역사를 더 깊게 이해하게 해주었다.
한류문화로 한-쿠 교류를 이어가다
한인이민사 101년이라는 긴 역사를 지닌 쿠바는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미수교국 중 하나다. 6·25 전쟁 때만 해도 쿠바가 우리나라에 물자를 지원할 정도로 우호적인 관계였으나 1959년 공산혁명 이후 관계가 악화되어 외교 관계를 맺지 못했다. 비록 국가 간의 공식 외교관계는 없으나 문화를 통해 두 나라는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이 가교 역할을 하는 이들 중 한 사람이 장희주 프로그래머일 것이다.
쿠바에는 한국 대사관도 영사관도 없으며,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의 아바나 지사가 우리나라의 유일한 공식 기관이라고 한다. 쿠바는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여파로 식량 파동과 기름 파동이 일어나 매우 어려운 상황이며, 사람들이 식량을 구하려고 긴 줄을 서 있는 모습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고 한다. 한류 열풍으로 코로나19 전엔 한 해 1만 명 넘는 한국인들이 쿠바를 찾기도 했지만 코로나가 시작된 2020년부터 관광객이 끊어지고 쿠바인들의 삶은 더 피폐해졌다고 한다. 쿠바인들의 한 달 임금은 30불 정도로 생필품을 구입하기도 힘든 상황이지만 이런 와중에도 한류문화를 즐기는 ‘한류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폐쇄적이고 개방에 소극적인 나라라고 생각했던 쿠바에서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변화의 조짐이 생기고 보이는데 K-팝, K-드라마, K-무비 등 한국문화가 그들의 가치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전해들으며 괜스레 으쓱해진다.
희망적 메시지로 쿠바 청년들을 꿈꾸게 하는 한류
아바나 거리에서 만나는 K-팝 노래와 춤
쿠바 카마구에이에 사는 청년들이 자체적으로 결성한 한국 문화 모임Korea-Cuba Camaguey Toghther, KCT은 방탄소년단이나 영화 〈기생충〉 등에 매료된 대학생을 중심으로 온오프라인에서 활동하는 이들만 약 1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들은 해외 콘텐츠 유입이 제한된 상황에서도 유튜브나 SNS 등을 활용해 자발적으로 한국 문화를 공유하고 확산시킨다는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1년 동안 모은 돈으로 미국 등 해외에서 열리는 K-팝 가수 공연을 보러 가는 열성 한류팬들도 있다고 한다. 또한 쿠바에서 한국드라마나 한국가요는 현지 부모들조차 권유하는 긍정적인 문화로 꼽힌다. 이처럼 한국 문화가 쿠바의 젊은 세대에게 탈출구요, 긍정적인 미래로 나아가는 데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히트한 〈이태원 클라쓰〉를 예로 들며, 주인공이 많은 역경을 딛고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결국 성공에 이르게 되는 스토리는 쿠바 청년들에게도 희망적인 메시지로 다가가 꿈꾸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현재 방탄소년단의 인기는 미국문화 개방이 완화됐던 1990년대에 마이클 잭슨이 누린 인기에 비할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이곳 아바나 거리에서 방탄소년단과 K-팝 가수들의 노래와 춤사위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묵는 호텔의 직원들도 한국인인 나를 보면 싸이의 〈강남스타일〉과 방탄소년단의 춤으로 환대했다.
구시가지는 바로크 양식과 신고전주의 건축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1960~1970년대 도시를 재현해놓은 듯한 분위기다. 어느 한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 속으로 쿠바 뮤지션의 선율에 맞춰 정열적인 춤이 이어진다.
헤밍웨이가 551호 객실에 머물며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의 첫 장을 썼다는 올드 아바나의 암보스문도스 호텔과 헤밍웨이의 단골 레스토랑 라 플로리디타에서 모이또를 마셔보며 춤과 음악이 함께하는 헤밍웨이 거리를 걸었다. 소니 알파 350 모델로 소지섭이 쿠바에서 촬영한 광고의 장면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예술과 혁명의 신시가지는 체 게바라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정부기관 건물과 그 앞에 위치한 혁명 광장, 호세마르티기념탑 등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들이다. 카메라 광고, 영화 〈분노의 질주〉 촬영지로 유명한 말레꼰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카리브해의 어마어마한 파도가 방파제를 덮치는 찰나, 하얗게 부서지는 물벼락을 맞으며 말레꼰 해안도로를 달리는 핑크빛 올드카는 쿠바라는 곳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한 컷의 이미지다. 실제 1950년대 올드카들이 거리를 주행하는 아바나의 말레꼰 비치를 걷다보니 옛 영화 속의 도시로 소풍 나온 듯 설렌다. 쿠바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로맨틱한 이 거리는 드라마 〈남자친구〉의 메인 무대이기도 하다.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첫 장면에도 등장하는 이 방파제는 아바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의 서쪽 바다로 해가 지고 주변의 모든 풍경이 선홍색 노을로 물들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말레꼰 비치로 나와 시간을 보낸다. 정말 어디서든 카메라 셔터만 누르면 작품이 된다.
안젤라 프로그래머는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를 비롯한 K-팝 그룹의 인기로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에 가고 싶어하는 쿠바의 젊은이들이 아주 많다”고 전한다. 이는 2019년 쿠바를 배경으로 한 여행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고, 쿠바를 무대로 삼은 드라마 〈남자친구〉가 높은 인기를 얻은 것도 한몫을 더한다고 말한다. “미수교국인데다 북한과 정치적으로 가까운 쿠바에서 한국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신호이며, 한국과의 수교를 앞당기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2015년에는 한류팬 1,000여 명이 만든 한국문화애호동호회를 결성하는 등 한국 드라마, 음식, 음악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작년 2021년에는 아바나에서 주멕시코대사관이 연 쿠바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리셉션에서 쿠바젊은이들이 한국 아이돌 그룹의 커버댄스 공연까지 선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한류의 열풍은 태평양을 오가며 활발한 문화 교류로 이어져 언젠가는 “BTS를 비롯한 K-팝 가수들이 쿠바에서 콘서트도 열고 쿠바에서 한국영화제도 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그는 5월 쿠바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쿠바의 인기 배우 알리시아 에차바리아 비달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 못다 나눈 쿠바의 한류 열풍은 한류팬 에차바리아의 생생한 인터뷰로 전한다.
INTERVIEW
한류팬이자 쿠바 인기 배우 알리시아 에차바리아 비달
쿠바영화제를 통해 쿠바의 인기배우인 알리시아 에차바리아 비달 배우님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국 방문은 처음이신지요? 먼저 한국에 오신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한국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한국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45시간이나 걸려서 힘이 들었지만 그래도 설렜어요. 쿠바 사람들이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저도 쿠바에서 한국드라마와 영화를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인지 막상 한국에 도착해서도 낯설지 않았어요.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봤던 그 이미지를 그대로 보게 되니까 무척 친근한 느낌을 받았어요.
배우 알리시아 에차바리아 비달에 대해서는 〈Ciudad en Rojo〉(2009) 데뷔하였고, 〈우화Fabula〉(2011) 외 다수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바나국제영화제Havana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서 코랄상Coral Prize(2011)을 받았으며, 여우주연상Best Female Performance(2009)도 받았다는 간략 소개만 있는데요. 알리시아 배우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네 저는 쿠바의 영화배우이면서 연극배우이기도 하고, TV 드라마(2022년 쿠바 인기 드라마 〈뚜 Tú〉 의 주인공)에도 출연하고 있습니다. 쿠바 국민배우인 페르난도 에차바리아가 저의 아버지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출연한 연극 〈리어왕〉을 보고 감명을 받아 연기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열다섯 살에 연기학교에 들어갔고, 열여덟 살에는 아버지와 처음으로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습니다. 아바나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현재 쿠바예술학교ISSA에서 연기를 가르치고 있어요. 한국의 영화, 음악 등 한국문화를 너무나 사랑하는 한 사람입니다.
쿠바 영화와 문화
한국문화를 사랑하신다니 문화잡지를 발행하는 사람으로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한국인들은 쿠바영화 하면 페르난도 페레즈 감독을 떠올립니다. 2004년 제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휘파람Life Is To Whistle〉으로 JJ-Star상을 수상하면서 언론에서도 화제가 되었는데요, 2016년 쿠바 영화제가 ‘영화감독 페르난도 페레즈의 회고전’을 마련하기도 했지요, 현대 쿠바 영화를 대표하는 페르난도 페레즈 감독은 “쿠바의 감독들은 상업적 성공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돈 계산을 시작하는 순간, 예술은 오염된다”며 “감동을 넘어서 관객으로 하여금 삶과 사회를 생각하게 하는 힘을 주고 싶다”고 말해왔습니다. 당시 쿠바영화를 좋아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영화를 관람하고 페르난도 페레즈 감독을 직접 만났지요. 쿠바인들도 페르난도 페레즈 감독을 좋아하는지요? 배우님과의 인연도 있는지 궁금합니다.
페르난도 페레즈 감독을 쿠바 사람들이 왜 좋아하냐 하면 이 사람이 일상에서 일어나는 쿠바 사람들의 어떤 삶의 모습이라든가 감정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고스란히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페르난도 감독 같은 경우에는 배우나 같이 일하는 스태프까지도 최대한 존중하면서 일하기 때문에 쿠바인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도 굉장히 좋아합니다. 특히 쿠바배우들은 이분하고 일하는 것을 아주 큰 영광으로 생각해요. 왜냐하면 감독으로서도 너무나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고, 인간적으로도 너무나 좋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저도 함께 작업을 하고 싶었죠. 하지만 페르난도 감독님이 한창 작업을 하실 때 저는 너무 어렸어요. 또한 제가 배우로서의 경력도 많지 않아서 저한테까지는 기회가 별로 닿지 않았죠. 그렇지만 저희 아버지는 페르난도 감독과 여러 번 작업했어요.
그리고 한국인들은 음악영화 빔 벤더스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통해 쿠바를 만나게 되는데요. 6일간의 녹음으로 완성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앨범은 그래미 어워드 수상, 빌보드 차트 1위, 전 세계 수백만 장의 음반 판매 등 세계 대중음악사에 유례없는 기적의 스토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전 2015년 베를린영화제에서 빔 벤더스 회고전을 통해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관람했습니다. 그리고 쿠바를 방문했을 때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며 빔 벤더스 공연을 직접 관람하기도 했는데 무척 감동받았습니다. 쿠바인으로서 빔 벤더스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갖는 의미를 듣고 싶습니다.
빈 벤더스가 만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같은 경우는 영화로서는 고전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만 사실 쿠바에서는 실제로 그 영화를 보는 이들이 많지는 않았어요. 쿠바인에게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영화보다는 일상에서 음악으로 즐길 수 있으니까요. 음악의 역사를 풍부하게 담고 있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쿠바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특별하고 아주 의미 있는 밴드라고 할 수 있어요
혁명 세력에 속했던 토마스 구티에레즈 알레아 같은 감독은 쿠바의 현실을 직시하는 사회파 영화들을 만들면서 쿠바영화가 국제무대의 주목을 받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만든 〈저개발의 기억〉은 쿠바혁명 앞에 선 쿠바 중산층 지식인들의 공허함과 정체성 문제를 날카롭게 파고들어 찬사를 받았으며 최고의 제3세계 영화를 꼽을 때 빠지지 않죠. 이외에도 〈학이 난다〉로 유명한 소련 감독 미하일 칼라토조프는 쿠바에서 쿠바혁명 과정을 다룬 〈나는 쿠바〉라는 걸작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 상징성 때문에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곳이기도 한데요. 크리스 마르케, 장 뤽 고다르 같은 정치적인 프랑스 영화를 보다 보면 피델 카스트로와 쿠바가 자주 등장하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쿠바영화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쿠바영화를 한 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요. 영화라고 하는 게 현실이 일상을 다녀가는 일들이잖아요. 똑같이 현실을 반영하지만, 영화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쿠바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도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쿠바 사람들은 항상 “우리는 피가 굉장히 뜨겁다”고 얘기해요. 쿠바인들을 만나면 날씨 얘기, 그다음에 정치적인 얘기를 해서 굉장히 복잡할 수밖에 없지요. 또한 쿠바인들은 자신이 쿠바인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쿠바영화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 중 하나인 이민 문제를 다룬 영화에서 잘 드러납니다. 떠난 이들의 성공에 대한 갈망, 남은 이들의 허무, 그리고 향수 등 자존감을 건드릴 수 있는 이런 현실 문제를 풍자적으로 다루고 잘 표현하는 것이 쿠바영화의 강점입니다. 이러한 속성들을 알게 되면 영화를 보다 깊이 보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인들은 정말 쿠바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쿠바에 대한 아련한 낭만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쿠바를 알아가는 그 하나가 바로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배우님의 출연 영화 〈우화〉도 쿠바영화제에서 상영하고 관객들을 직접 만나는 GV도 진행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영화 관람하고 GV도 참석할 텐데요. 영화 〈우화〉를 한국관객들이 어떤 관점으로 봐주었으면 좋을지 관람 포인트를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화〉에서 맡은 배우님의 캐릭터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세실리아라는 쿠바에 만날 수 있는 어떤 평범한 많은 쿠바 여성들을 대변하는데 안타깝게도 경제적인 이유로 매춘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여성으로 나옵니다. 〈우화〉는 처음 시작할 때는 사랑에 관한 짧은 영화처럼 보여요. 두 젊은 남녀의 로맨틱 영화처럼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맡은 역인 세실리아는 매춘부입니다. 여기서부터 진짜 드라마가 시작되지요.
쿠바사회에서 가족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항상 중요한 건 자기 자신입니다. 어떻게 보면 좀 이기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화〉는 사랑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세실리아가 매춘을 할 수밖에 없는 쿠바의 사회적 배경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세실리아는 공부도 많이 한 지식인 계층인데도 취업할 기회가 없어요. 외국인을 상대로 매춘을 해야만 하고,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아르투로 역시 이를 암묵적으로 인정해줘야만 하는 상황인 거죠. 아르투로 같은 경우는 예술을 공부하는 화가거든요 그림을 그리고 실제로 작품을 파는 화가인데요. 남자가 예술가다 보니까 현실에서 어떤 추구하는 방향이 다를 수가 있는 거죠. 그로 인해 어떤 일들이 사회적으로 얽히면서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영화죠.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진짜 사랑이라고 하는 존재가 경제적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 결핍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이 있는 건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왜냐하면 추구하는 게 다르기 때문이죠. 우리가 살면서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있죠. 영화에서는 사랑이 그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관객들에게 던지는 해답 없는 질문 같은 거지요. 그래서 영화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인물이 가지고 있는 삶의 다른 가치를 이해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을 만약에 이해하게 되면 영화의 주제를 좀 더 충분히 깊게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쿠바인들이 좋아하는 한국문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한국인들은 쿠바를 정말 사랑합니다. 저만 해도 제 책꽂이에 손때 묻은 체 게바라 평전과 피델 카스트로, 호세 마르티 시집이 꽂혀있고,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영어판과 읽지도 못하는 스페인어판에다 비디오테이프까지 있습니다. 호세 페르난데스 디아즈의 〈관타나모의 농사꾼 아가씨〉, 미국 포크계의 아이콘인 피트 시거, 샌드파이퍼스, 트리니 포페즈, 셀리아 크루즈, 〈Time〉이란 노래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 민속음악밴드 포조-세코 싱어즈, 콤비아 세군도 등 쿠바음반도 여러 장 있습니다. 이외에도 최고급 시가와 럼의 섬 쿠바는 한국인이 정말 사랑하는 로망 자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들은 쿠바여행도 참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지난 4월 쿠바를 여행했는데요. 쿠바에 가보니 쿠바인들도 정말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좋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쿠바인들이 얼마만큼 한국문화를 좋아하는지, K-컬처에 대해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한국드라마는 쿠바에서 어떤 비즈니스를 활성화하는 데 엄청나게 많은 영향을 줍니다. 한국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무조건 어린 아이들이냐고요? 그게 아니라는 거죠. 한국드라마는 오히려 다양한 연령층 다양한 어떤 직업층을 비롯한 사회 전반적으로 다양하게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데 쿠바의 국민배우인 제 아버지도 K-드라마의 광팬이에요.
특히 최근에 〈오징어 게임〉(황동혁 감독, 2021)을 통해서 쿠바인들은 굉장히 통쾌함과 공감대를 느꼈고, 〈미스터 션샤인〉(감독 이응복, 2018)을 비롯한 한국드라마들에 쿠바 국민들도 열광했습니다. 한국문화를 접하기 위해서는 다운로드 된 파일이 필요한데요. 그러려면 파일을 저장할 수 있는 외장 하드가 필요해요. 어쩌면 외장 하드가 쿠바의 K-컬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어요.
쿠바에서는 의사도 의사 수입만으로는 살 수 없을 정도로 경제 상황이 어렵다 보니, 쿠바에 공식적으로 들어오지 않는 외국영화나 드라마를 담아 판매하거나 대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외장 하드에 K-드라마가 없으면 돈을 벌 수 없어요. 그 정도로 쿠바에서 한국문화는 인기가 있습니다.
한국영화에서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 외에도 〈미나리〉, 〈올드보이〉 등 한국영화 마니아들이 많아서 한국감독과 배우들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그리고 쿠바 영화예술 수업에서는 김기덕 감독을 굉장히 많이 거론합니다. 이 감독이 스토리를 풀어가는 방식이라든가 그다음에 배우들이 얘기한 인물의 연기를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되는지 이런 디테일한 부분들에 대해서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K-팝은 이미 세계를 강타했듯이 쿠바에서도 핫합니다. BTS를 비롯한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를 따라부르고 춤을 추는 젊은이들을 거리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한류 열풍으로 한국패션을 좋아하고 한국 전자제품을 갖고 싶어하는 쿠바인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배우님께서도 한국문화를 좋아하시는지요? 배우님은 한국문화를 어떤 경로로 접하게 되었고, 특히 좋아하는 한국감독이나 배우, 또는 아티스트가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처음으로 한국 영화를 접하게 된 건 2008년 쿠바에서 ‘세계영화페스티벌’이 있었어요. 경쟁작도 있지만 경쟁하지 않고 그냥 일반인들한테 사용하는 것도 있잖아요. 그때 주진모, 조인성이 나오는 〈쌍화점〉(유하 감독, 2008)을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한국의 고려 말 스토리를 다룬 고전물이었지만 스토리에 대해서 충격도 받고 또 주인공 남자 배우들이 잘 생겨서 충격을 받았죠. 그런데 연기도 너무 좋았어요. 그러면서 K-드라마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기 시작한 거죠. 최근에 본 한국드라마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오징어게임〉이었고, 〈미스터 선샤인〉도 좋았어요. 이병헌, 김태리 배우의 연기가 정말 좋아서 존경할 정도였어요. 그때부터 전 이병헌 팬이 되었습니다. 영화 중에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아바나대학에서 같이 심리학을 공부한 친한 친구가 있는데 한국 남자랑 결혼해서 지금은 한국에 살아요. 그 친구가 USB에 한국영화, 드라마를 담아줘서 많이 봤습니다.
그리고 쿠바에도 한국문화 좋아하는 모임들이 있어요. 거기 가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맨날 한국배우들이 나오잖아요. 거기서 한국배우 보고 좋아하게 되면 인스타를 찾아서 그 사람을 팔로우하는 거예요. 저도 공유와 김우빈을 좋아해서 그들이 출연한 영화와 드라마도 많이 봤습니다. 공유 커피 광고를 보며 얘기하기도 하고, 김우빈 드라마 보며 같이 웃기도 했습니다.
한국-쿠바의 문화교류
지난 4월 쿠바 방문 때 쿠바북페어에도 참석했는데 생각보다 큰 규모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쿠바에서는 스페인어로 번역된 한국 책을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번역된 책들이 있는데 제가 못 찾아본 걸까요? 현재 쿠바에서도 한국영화와 드라마, 음악이 굉장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하는데 책으로 번역된 것은 없는지요?
이곳 한국영화와 드라마는 스페인어 자막이 다 있어요. 자막은 쿠바에서 직접 하지 않고 멕시코나 페루 이런 데서 작업을 다 해요. 불법이지만 그걸 다운로드 받아 보는 거지요.
한국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국서적 또한 멕시코나 페루 이런 스페인권에서 번역본을 찾아봅니다. 그리고 한국어에 관심이 있고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한국어 학당이라든가 공부방같은 한국기관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쿠바에서 지금 한국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북한 사람들도 포함되는데요. 한국문화에 열광하는 북한의 젊은 친구들도 암암리에 한국문화를 찾아보고 서로 공유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한국에 오기 전에 맨날 한국드라마 보며 한국어 공부했어요.(웃음)
서로의 문화를 사랑하는 한국과 쿠바의 수교가 빨리 이루어져서 양국 간의 더 많은 교류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국에서 머무는 동안 한국문화 많이 즐기시길 바라며, 마지막으로 한국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자유롭게 해주십시오.
한국에 초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중에 한국과 쿠바의 관계가 좋아져서 한국영화에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 한국배우들은 심도있는 연기를 정말 잘하는 것 같아요. 한국-쿠바의 문화교류가 더 확대되어 제가 좋아하는 이병헌 배우와 함께 연기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쿨투라》 2022년 9월호(통권 99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