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좁은 통로. 머뭇거림. 입구로 들어설 때 한 번은 주위를 둘러봐야 하는 곳. 서울 거리에 있지만 낡아버리다 못해 차라리 이질적이게 된 장소. 거리의 외부dehors. 이곳이 이 전시가 펼쳐지는 공간이다. 가끔씩 이 공간을 찾는 자들이라면 이곳이 조금 익숙해졌겠지만, 사실 익숙해진 것은 공간에 대한 익숙함이 아니라 그곳이 여전히 불편하다는 사실에 대한 익숙함일 터이다. 예술이 여전함 속에 잔재하는 불편함을 들춰내는 일이라면 이 전시 건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오브제다. 비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또 하나의 문턱을 넘어야 하는, 이 여전한 불편함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발자국 소리야말로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단서다.
문을 열면 펼쳐지는 도플갱어 세계. 기획전 《개와 늑대와 도플갱어 숲》(2024)은 임원묵 시 이미지가 변이된 잔상들이 득실하다. 이곳이 어떤 구조물 안이라기보다 차라리 현실 바깥에 분리된 공간처럼 느껴진다면 이러한 이유에서다. 이미지의 이미지, 복제물의 복제물로서 시뮬라크르simulacre는 전시장 가장자리에 붙어 기생한다. 이미지는 도사린다. 그저 입을 닫고 기회를 엿본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잔상이 되어 다시 회생할 그 순간을 숨죽여 기다린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말하고 있는 감각들은 멈출 수 없는 꿈틀거림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가능한 한 벽에 가까이 붙어 기생한다. 이 불안정한 가장자리에서 파생되는 일의 기미. 그 미세한 가능성들은 작품마다 조금씩 차이를 일으키며 질서에 균열을 낸다. 균열의 흔적이 있는 곳에 이미지가 있다.
임원묵이 “몹시 추운 것들을 생각했다”(「시」)라고 말할 때 누군가는 감각의 떨림을 생각했겠지만 예술은 감각 이면의 떨림을 이야기한다. 섭씨로 환산되지 않는 떨림. 시간 질서 가장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흐릿한 이미지를 예술가는 말한다. 김슬기의 〈Dump:어둠 속의 당나귀와 고양이Dump: A Donky and Cats〉는 어둠 속에 버티고 서 있는 당나귀와 고양이의 잔상이다. 마티카 합판 네 개를 합쳐 그것을 깎아내고 석분 점토를 얹기를 반복하는 과정은 가까스로 잔존하는 이미지를 예각하는 작업이다. 이미지는 조금씩 겹쳐지고 해체되기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태가 드러남을 김슬기는 아는 까닭이다. 얹고 깎기를 거듭할수록 조각의 정형성은 오히려 비정형적 정동affect들을 흡입한다.
알루미늄 캔의 구부러짐과 음각의 깊이는, 자신이 강철이 아님을 자각한 존재의 우울을 대변한다. 멜랑콜리 주변으로 또 다른 도플갱어들이 잔상을 드러낸다. 고양이가 출몰한다. 가지각각의 고양이들은 차이와 반복이 공존하는 숲의 존재들이다. 고양이라고 불리지만 다 같은 고양이가 아님을 보여주는 이미지의 연쇄. 그림자가 있으면서도 없고 단지 흐릿하게 파인 기억 속에 부유하는 것. 타자성의 소유자(들). 작품 한글 제목이 ‘고양이’이지만 영문명은 ‘cats’라는 사실은, 하나이면서도 여럿인 도플갱어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보편이란 이름으로 타기된 존재의 슬픔을 감싸주는 말이다. 애도 불평등에 허덕이는 질서 가장자리의 존재들을 이르는, 미끄러지는 시니피앙이다.
구겨지고 납작해지다 못해 차라리 회화적인 이미지와 함께 버티고 서 있는 것은 또 다른 도플갱어다. 오백 원을 넣으면 초콜릿 똥을 누는 요술 당나귀. 자본을 이미지로 대체하는 당나귀의 요술에 질서를 비집고 들어서는 순간의 미학이 있다면, 김슬기는 그 순간의 파편을 다시 재현하여 크로노스적 시간 질서에 균열을 낸다. 그가 발굴하는 것은 충격적이지는 않아도 충분히 미처 애도 받지 못하고 잔상이 되어버린 존재다. 기억 속에 존재하지만 시간이 쌓임으로 조금씩 흐릿한 장면으로 전락한 이미지를, 작가는 가장 흐릿하고도 모호한 질감으로 작업한다. 잔상은 모호한 것이 가장 정확한 것이니까. 얇게 파내어 윤곽만 남은 단상과 그곳에 위태롭게 서 있는 당나귀의 현존을 증명하는 것은 이미지의 경계를 뚫고 분출되는 초콜릿 똥이다. 이렇듯 김슬기는 조각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가장 모호한 방식으로 희미한 순간의 이미지를 표현한다.
아니 재생한다. 김슬기는 만들지 않고 재생시킨다. 질서의 가장자리에 버티고 있는 위태로운 잔상들을 회복하는 게 그의 작업이다. 〈Dump: 말 드로잉Dump: Drawings)〉은 요술 당나귀 맞은편에서 기생하는 도플갱어다. 한때 하나의 표상으로 공중을 오르내리며 TV 화면을 장식했으나 이제는 정체가 모호해진 나머지 방송국의 경계를 헤매는 타자. 객체는 상징이 될 때 질서와 밀착되지만, 한 번 미끄러지면 그저 무의미한 잔상이 됨을 스스로 증명한 존재. 이 페가수스도 유니콘도 아닌 모호한 잔상을 김슬기는 손끝의 감각으로 새기고 붙인다. 김슬기 작품의 차별성은 여기에 있다. 김슬기는 잔상으로 타락해 버린 모호성을 전유하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재생한다. 이미지의 이미지, 복제의 복제로 연쇄되는 그의 작업은 버려진 타자성을 전유하여 질서에 저항하려는 탈식민적 사유의 흔적이다. 도태된 타자들이 도사리는 가장자리에서, 이미지는 뭉개지고 던져지고 꺾이고 파이는 방식으로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증명의 형식 배후에는 그림자처럼 드로잉이 매개된다.
그러나 전시는 목판에 새겨진 음각陰刻만큼이나 들려오는 음의 감각 또한 있다. 연쇄되는 이미지와 함께 리듬이 반복된다. 전시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예술 ‘형식’을 대변한다면 김형규는 경계가 구분되면서 해체되는 그 ‘방식’을 말한다. 두 개의 FHD 채널에서 펼쳐지는 〈시간이 멈추면 계절이 간다〉는 광고의 클리셰를 비틀어 미디어아트 속성과 결합한 작품이다. 매체의 자극성을 최소화한 듯 보이지만 이러한 절제 속에는 시간의 떨림과 함께하는 리듬이 잔재한다. 김형규는 각 채널과 장면마다 중력을 다르게 부여하는데, 이는 시간차를 일으켜 한 공간에 있는 장면을 다양한 시점과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는 효과를 준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이러한 시간차와 함께 귓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청각 이미지다. 마치 단조와 장조의 경계에 있는 듯한 선율의 반복은, 각 장면마다 이어지며 시간의 흐름을 지연한다.
시간의 지연은 공간에 대한 인식을 전제한다. 도시 곳곳에는 침묵이 고인 장소가 있다. 침묵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언어이기도 하지만 비인간의 고유한 소통 방식이기도 하다. 김형규 작품 곳곳에 인간의 시점이 아닌 비인간의 시각으로 비춰지는 장면이 있는데 이 또한 침묵의 방식으로 비인간이 우리에게 말하는 순간의 구현이다. 김형규는 비인간의 시각으로 시간을 감지하고 그 안에 잔재하는 대상을 연출하는 데 능숙하다. 객체를 카메라 주체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객체의 입장에서 장면을 다각화하는 연출 작업은, 객체를 선험적 시각으로 바라보기를 거부하려는 시도다. 느린 호흡으로 중력의 무게를 충분히 가늠하는가 하면, 프레임 바깥을 응시하는 도플갱어의 눈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위치를 전복한다. 주객은 전도되고 사유는 전환된다.
그러므로 〈고백과 독백 그 어디〉는 고백이면서도 독백과도 같은, 그 언어적 형식의 경계를 맴돌고 있는 목소리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미지는 맥락과 함께할 때 의도를 지니지만, 그 틀에서 탈피하면 이미지는 의도의 얽매임에서 벗어난다. 이 작품이 영화의 일부를 차용한 것은 특정한 맥락에서 벗어난 영상 이미지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인물의 고백은 독백이 되고, 독백은 화면의 전환과 함께 다시 침묵이 된다. 인물의 말이 누군가에게 도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언어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잔상처럼 머무는 도플갱어의 것일 수도 있음을 방증한다. 안정되지 않고 떠도는, 영원한 자리가 없이 방황하는, 그 잔상과 불온한 언어가 이곳에 있다. 이것은 현실의 사각에서 미래에 보내는 불온한 도플갱어의 목소리다.
〈미래에 보내는 노래〉는 전시가 되기까지 과정을 다시 이미지로 재현한 메타적 협업 작업이다. 예술가는 예술에 대해 정의하지 않는다. 다만 작품이 되어가는 과정을 사유함으로 예술적인 것에 다가갈 뿐이다. 〈하얗지만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은〉은 오래된 브라운관을 활용한 메타적 작품으로, 시와 조각과 영상이 분절적이면서도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각 장르간 이질성을 교란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이질적인 것이 겹쳐지는 그 순간에 예술적인 것이 파생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함의한다. 오즈의 영화에 많이 사용되는 2차 프레임은 본래 인물을 틀 안에 가두는 역할을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관객의 시선을 틀 안에 머물게 한다. 평범해 보이는 오브제나 인물의 제스쳐가 오히려 극화되고 강조되는 것 역시 중첩된 프레임에서 기인한다. 기록하는 자의 언어가 구겨지고 파편화되는 것은 언어 이미지가 조형되거나 조각난 픽셀처럼 해체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단서다. 이곳에서 프레임은 해체의 도구다.
〈푸른 맨발의 인간〉은 바다에서 유영하는 푸른 사람의 이미지가 체감된다. 인간을 덮은 잘게 부스러진 모래와 그것과 같이 쌓이면서 다시 흩어지는 잔상. 그 실체 위에는 포근하게 부풀어오른 오렌지가 올려져 있다. 새벽같이 주변을 배회하던 〈오렌지의 새벽〉은 석분 점토의 촉촉함과 포개지며 인간과 피부를 나눈다. 따뜻하다. 인간과 비인간의 이질적인 만남은 이렇게나 따뜻하다. 〈푸른 불씨〉에 털옷을 입히는 것처럼 가장 낯설게 보이는 사건이야말로 가장 큰 이미지의 역설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의도하지 않음으로 의도를 드러낸다. 이미지는 작가를 통해 말하지 않고 이미지 그 자체로서 말하기를 시도한다. 의도하지 않은, 아니 의도할 수 없는 이미지 그 자체로서 말하는 예술. 이것이 이번 전시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의도될 수밖에 없는 도플갱어의 전언이다.
기억과 망각. 시간과 공간, 이미지와 이미지를 넘나드는 균열의 형식은 기어코 ‘생동하는 물질’로서 이미지를 출몰시킨다. 탈옥한다. 이미지는 스스로 탈옥한다. 감각에 너무 노출된 나머지 오히려 너무 무감해져 커져 버린, 그 파란 인간의 커다란 발에서, 좁다란 계단을 오르며 이곳을 향하는 탈옥수들의 둔탁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여기는 도플갱어가 생동하는 잔상의 세계. 해체와 모호함이 가득한, 질서를 탈옥한 잔상들이 부유하는 전시 공간에서 누군가는 끝내 〈종착역〉을 찾아가겠지. 단서는 애플박스에 있지만 마지막 역은 그곳이 아니다. 이미지는 거듭해서 위태로운 자신을 복제하니까. 이 위태로움의 향연에서,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 / 램프 아래에서”(「새와 램프」) 도플갱어는 다시 출.몰.하.니.까.
방승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국제어문학회 연구이사. 2022년 계간 《시작》에 「지옥에서 남겨진 시체 : 허수경 유고시론」을 발표하며 신인상으로 등단. 기성 예술가의 작품을 새롭게 읽기 위한 연구 진행. 저서로 『김남조 시의 정동과 상상』이 있음.
* 《쿨투라》 2025년 1월호(통권 127호) *